허술한데 웃기다? 밈이 되기까지의 결정적 장면들
‘허술한 PPT 밈’이란 말을 들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기본 템플릿을 그대로 쓴 디자인,
도형이나 애니메이션 효과는 어설프고,
폰트는 기본 설정 그대로,
이미지 비율도 맞지 않아 삐뚤삐뚤한 상태로 배치된 슬라이드.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PPT는 가끔 진짜 웃기다.
그 웃음의 정체는 뭘까?
바로, 진지함과 허술함의 갭에서 발생하는 반전 유머다.
이 스타일은 2010년대 초반부터 대학 발표 과제에서 자주 목격된 양식이다.
모든 게 정돈되고 완성도 높은 포맷을 요구받는 학습 환경에서,
오히려 그 기준을 깨버린 허술한 발표는 의외성이라는 큰 재미를 줬다.
그리고 이러한 ‘어설픈 PPT 발표’ 장면을 친구들이 휴대폰으로 찍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업로드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OO학과 발표 레전드ㅋㅋㅋㅋㅋ”
“이게 과제 제출이라고?? 웃긴데 또 설득돼서 화남ㅋㅋ”
이처럼 진짜 과제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발표 장면이 짤과 영상으로 퍼지며 밈화되었다.
특히 영상의 경우,
발표자가 지나치게 진지한 어조로
형편없는 시각자료를 보여주며
이상한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는 아이러니한 연출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게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2020년 무렵 틱톡과 릴스, 유튜브 쇼츠에서 콘텐츠화되면서다.
학생들은 발표 장면을 의도적으로 ‘촌스럽고 허술하게’ 꾸미고,
그 위에 이상한 논리를 더해
“이게 그 유명한 ㅋㅋ 허접한 PPT 이론입니다” 같은 식의 자막을 넣는다.
즉, 이 스타일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웃기기 위한 디자인 전략’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대학 과제 발표’라는 현실적 배경이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허술함은 전략이다: 일부러 못 만든 듯한 ‘가짜 어설픔’의 미학
우리가 흔히 보는 ‘허술한 PPT 밈’은 사실 그리 허술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교하게 허술한 척하는 전략적 시각 구성물이다.
기본 템플릿을 쓰고, 다소 진부한 이미지와 클립아트를 사용하고,
엉성한 화살표와 오타,
무리하게 억지스러운 이론 도식까지 포함하지만 —
그 모든 건 철저히 기획된 어설픔이다.
이러한 스타일은 ‘Low-effort aesthetics’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즉, 노력하지 않은 듯 보이되, 사실은 철저하게 의도된 디자인이라는 뜻이다.
특히 밈 문화에서는 ‘지나치게 고퀄리티’보다
‘누구나 만들 수 있어 보이는 콘텐츠’가 훨씬 빠르게 확산된다.
허술한 PPT 밈이 가진 전략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낮은 진입장벽
누구나 파워포인트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포토샵이나 영상 편집 없이도 밈 제작 가능.
의도된 진지함과 무관심 사이의 아이러니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면서 진지한 어조를 유지한다.
발표자가 웃지 않는 것이 포인트.
시각적 반전의 유머
예: ‘소의 발굽은 펀치다’라는 주장 → 고화질 클립아트 + 촌스러운 도식 + ‘따라서 소는 격투기 선수다’ 결론
이러한 방식은 의외로 설득력도 가진다.
사실관계는 엉망이지만, 발표 구조는 나름 논리적이다.
그래서 시청자는 웃으면서도 설득당한 느낌을 받는다.
이건 일종의 메타 개그다 —
“웃기기 위해 논리를 흉내 내고 있지만, 그조차 치밀하게 계산된 장난”이라는 것.
2020년대 초반 이후 이런 스타일은 SNS 콘텐츠로 완전히 자리 잡았고,
기업이나 브랜드에서도 이 형식을 패러디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채용 공고 PPT를 일부러 어설프게
신제품 소개 슬라이드를 밈 형태로
심지어 정치 콘텐츠나 사회 캠페인도 이 스타일을 차용
즉, ‘허술한 PPT’는 이제는 의도적 스타일링의 일종으로, 확실한 밈 장르가 되었다.
‘밈’이라는 장르로 살아남다: 왜 사람들은 이 포맷을 계속 쓰는가?
밈은 소모되기 마련이다.하지만 ‘허술한 PPT 밈’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살아남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 형식이 감정과 태도를 담기에 너무도 완벽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밈은 Z세대와 알파세대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특성과 잘 맞는다.
이 세대는 진지함을 꺼리고, 유머를 통해 간접적으로 감정을 전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식 토론보다 짧은 밈 하나로 입장을 드러내고,
이야기보다 시각적 장면으로 공감을 산다.
그리고 허술한 PPT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한다:
자기 검열 없는 감정 표현
슬픔도, 분노도, 당황스러움도 ‘웃긴 형식’에 담으면 덜 부담스럽다.
예: “OO때 내가 했던 발표 PPTㅋㅋ” (사실은 자기 비판)
소속감을 높이는 공통 코드
이 밈을 안다는 것 자체가 ‘온라인 정체성’이 된다.
공유된 어설픔은 온라인 유대감을 생성한다.
쉽고 빠른 창작 가능성
파워포인트 열고, 텍스트 몇 줄 쓰고, 도형 넣으면 콘텐츠 완성.
이는 ‘시간이 없는 현대인용 창작 포맷’으로도 이상적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이 밈이 점점 하위 장르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동물 이론 PPT 밈: 고양이가 범죄자인 이유, 햄스터의 정치 성향 분석 등
생활 철학 발표: 잠이 최고의 생산성이라는 논리적 발표
과장된 자기소개서 형식: “내가 왜 아침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 PPT”
이런 파생 콘텐츠는 모두 ‘허술한 PPT’라는 틀 위에서 탄생한다.
슬라이드 쇼 형식을 활용해
감정, 주장, 유머, 풍자를 모두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밈은 기능성과 확산성 모두를 갖춘 플랫폼 기반 콘텐츠인 셈이다.
결국, ‘허술한 PPT 밈’은
디자인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시대의 감정을 연기한 콘텐츠다.
그 위에 웃음, 피로, 자조, 그리고 약간의 진심까지 얹을 수 있는 이 형식은
아마도 앞으로도 지속적인 변형과 진화를 겪으며 살아남을 것이다.